태아의 언어학습 비밀이 밝혀지다

엄마 배 속에서 언어 이해하고 기억해

2013년 09월 04일(수)

 

조선시대 여성 실학자인 사주당 이씨가 쓴 ‘태교신기(胎敎新記)’는 태교에 관한 한 세계 최초 단행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책을 보면 ‘사교십년 미약모시월지육(師敎十年 未若母十月之育)’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즉, ‘스승의 10년 가르침이 어머니가 배 속에서 10개월간 가르친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태교의 중요성은 많은 과학적 연구결과로도 입증되고 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 연구팀은 그간 발표된 212건의 연구를 재분석해 인간의 지능지수를 결정하는 데 있어 태내 환경이 52%의 역할을 하며, 나머지 48%는 유전자가 좌우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네이처지에 발표한 바 있다.

태교는 태아의 사회성 및 창의성뿐만 아니라 인지력, 신체적 발달 등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최근에는 영양태교를 비롯해 태담태교, 음악태교, 미술태교, 영어태교, 명상태교 등 다양한 태교법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태아는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언어에 민감하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고 있다. 지난해 말 미국 퍼시픽루터란 대학의 심리학자 크리스천 문 교수팀은 신생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엄마 모국어의 특정한 소리에 대해 배운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미국 타코마의 매디건 군병원과 스웨덴 스톡홀름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어린이병원에서 각각 태어난 40명(총 80명)의 신생아를 대상으로 실시됐다. 연구팀은 신생아가 태어나기 10주 전부터 엄마의 모음 소리를 듣게 했다. 태아들이 청각에 대한 감각과 뇌 메커니즘이 형성되는 시기가 임신 마지막 10주이며, 모음은 엄마가 지속적으로 말을 할 때 자궁에서 그 배경 소리와 구분될 수 있는 두드러진 소리이므로 선택된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난 후 7시간에서 75시간 사이에 신생아의 절반은 모국어 모음을 듣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외국어 모음을 듣게 한 상태에서 컴퓨터와 연결된 고무젖꼭지를 빠는 상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 아기들은 모국어 모음을 들을 때보다 외국어 모음을 들을 때 더 자주, 그리고 더 오랫동안 고무젖꼭지를 빠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신생아의 경우 스웨덴어 모음을 들을 때, 스웨덴 신생아의 경우 영어 모음을 들을 때 그런 행동을 보인 것. 이에 대해 연구팀은 익숙한 모국어에 비해 낯선 외국어 모음을 들을 때마다 젖꼭지를 더 빨게 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모음 소리를 태아 때부터 학습한다는 의미다.

 

신생아는 백지상태가 아님을 증명해

이전 연구에서는 태아가 음악적인 리듬을 기억하거나 엄마가 자주 시청하던 TV 드라마의 주제가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이번에 태아가 부분적으로 언어를 학습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신생아는 더 이상 ‘백지 상태’가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런데 이런 연구결과들은 아기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 타당성을 검증하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게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말을 배운다는 객관적인 증거와 언어처리 능력이 발달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을 밝혀낼 순 없는 것일까.

최근 이에 대한 연구결과들이 잇달아 발표되었다. 프랑스 피카르디 쥘 베른 대학의 파브리스 왈로이스 박사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상분만아들보다 2~3개월 먼저 태어난 조산아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출생 2~3개월 전에는 뇌 상부영역들 간의 연결성이 확보되고 내이(內耳)와 대뇌피질의 연결성이 구축된 직후의 시기다.

연구진은 출생한 지 며칠 후 인큐베이터에서 잠자고 있는 조산아들에게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준 다음 그들의 뇌활동을 광학영상화 기법으로 모니터링했다. 예를 들면 조산아들에게 오랫동안 여성의 목소리만을 들려주다가 갑자기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를 섞어서 들려주자, 조산아들의 뇌가 움찔하는 반응을 나타낸 것. 또한 조산아들은 ‘가(ga)’와 ‘바(ba)’의 소리도 구분하며, 성인들이 미묘한 언어를 이해할 때 사용하는 대뇌피질의 특정 영역도 사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출생 전에 대뇌피질 내부의 언어적 연결성이 이미 확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아가 출생하기 전에 어려운 자음을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진은 태아의 뇌가 종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민감하며, 인간의 언어처리 능력이 약간은 선천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연구결과에 대해 조산아들은 출생과 동시에 일련의 신경 처리과정이 촉발되어 뱃속에 있는 같은 개월 수의 태아들과는 달리 언어에 반응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태아는 음절 변화와 모음의 길이까지 인식해

한편, 헬싱키 대학의 에이노 파르타넨 박사팀은 신생아들에게 뇌파(EEG) 센서를 부착하고 자궁 안에서 얻은 기억의 신경학적 흔적을 추적한 연구결과를 미 학술원회보(PNAS) 8월 26일자에 발표했다.

먼저 연구진은 임신 말기의 여성들에게 1주일에 여러 번씩 녹음된 음성파일을 들려줬다. 음성파일의 내용은 ‘타타타’라는 소리가 여러 번 반복되면서 간간이 음악소리가 들리되, 중간 음절이 종종 변화를 일으켜 음높이나 모음이 바뀌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아기들이 태어난 후 연구진이 다시 그 음성파일을 들려주며 EEG를 통해 반응을 확인한 결과, 실험군의 아기들은 ‘타타타’ 소리와 그 변형된 소리까지 알아듣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EEG 분석 결과 모음과 음정의 변화를 알아들은 신호가 엄마의 배 속에서 음성파일을 들은 회수에 비례하는 것으로 파악된 것이다. 더구나 아기들은 음절의 변화와 모음의 길이까지도 인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에 비해 출생 전에 음성파일을 듣지 않는 대조군 아기들은 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가 청각장애의 가능성을 지닌 태아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생후 1개월 미만의 아기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연구이므로 아기들이 성장함에 따라 기억이 유지되는지, 또는 자궁 속에서 배운 것이 언어학습이나 기타 능력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연구결과들이 발표됨에 따라 태아에게 음악이나 어학에 관한 과도한 태교를 주의해야 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너무 심한 소음은 청각을 교란하여 태아의 수면주기를 흩트릴 수 있으므로 빠르게 발육하고 있는 태아의 뇌를 태교라는 명목 하에 과도하게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충고이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 2noel@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