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같던 모든 것이 지난 후. 창 밖 새벽의 차소리만이 이명처럼 울리던 그 날.

그 어둠 속에서 전에 없던 자그마한 생명체가 이 없는 잇몸으로 내 가슴을 오물거리던 그 처음의 날.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던 그 애의 작은 입과 솜털 볼,

쉴새없이 곰지락 거리는 손가락과 속싸개를 탈출해 몸을 위로 밀어올리게 하는 조그맣고 귀연 발.

그걸 만질 때. 색색 숨소리.

아. 난 정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를 만났구나. 생각했던 그 여름밤이

어느새 6개월 전 일이다.

 

일년의 반을 엄마로 지내니 서진이가 없던 예전 생활은 전생처럼 멀게 느껴진다.

바빴던 한해였다. 갑작스런 남편의 이직.. 만삭의 몸으로 전주에서 안산으로 이사.. 16년 가족처럼 키웠던 강아지의 죽음..

친정, 시댁이 다 멀어져 외로웠던 마음에 충격이 컸다. 다 듣고 느낄 아기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더욱 김옥진조산원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출산 후 일주일 만에 검사 차 조산원 방문 했을 때 두 선생님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지던 일..

아기 낳고 이틀 만에 우는 아기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새벽에도 선생님들께 전화하고 문자했던 일..

몸이 안 좋아 수술하게 됐을 때 아기 봐주신다며 놀라오라시던 전화..

나와 내 가족이 환자나 손님이 아니라, 사람으로.

존중받고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주에 살 때 다니던 산부인과가 있었지만 출산은 병원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제모, 관장, 특히 회음부 절개를 피하고 싶었다.

모든 걸 참으며 자연분만 하러 들어간 친구들이 대부분 수술을 하게 되는 호러블한 상황을 목격하였고

24시간 진통 후 수술했는데 끝나고 나니 마취가 안되었더라는 등의 출산괴담을 여러차례 접하고 나니

자연스레 임신출산대백과의 '조산원' 페이지에 눈길이 갔다.   

조산원을 검색해봤고 김옥진조산원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EBS와 SBS 다큐멘터리에 대한 정보를 알고

다운받아 보고 나니 조산원에서 자연출산을 하기로 거의 마음을 굳히게 됐다.

 

처음 상담과 출산교육을 받으러 갈 때는 임신 중에 전주에서 안산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왔다갔다했다.

출산 당일에도 '병원으로 가지그러니' 하셨던 시어머니가 출산 후 검사일에 같이 조산원 방문하시더니 전북 익산의 홍보위원이 되신 것처럼, 나도 남편도 어려운 걸음을 한 보람이 있게 조산원 출산을 100% 결정짓게 됐다.

남편이 안산으로 이직하게 된 것도 운명처럼 느껴졌다.

 

5월 이사 후에 몸이 편해지니 아기의 몸무게가 급속도로 늘어 6월이 되자 예정일 2주 전에 3.3kg이 되었다.

계속 몸상태를 체크해주시던  선생님께서 출산교육 때 나눠준 체크리스트를 잘 활용할 것과 많이 걷기를 권하셔서

안산에서 좋다하는 호수공원과 화랑유원지를 열심히 걸어다녔다.

출산교육 때 언제 나오라고 하면 아기가 듣고 그 때 나온다고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신기하게도

예정일인 6월 15일이 아닌 내가 줄곧 '아기가 커서 일주일 쯤 전에, 아마도 6월 9일에 나올거'라 말한 것을 들었는지

6월 9일 아침 6시 쯤 이슬이 비추었다.      

 

그 소식을 들은 친정, 시댁 식구들이 올라오셨다. 진통 간격이 3분이 되면 조산원에 가기로했는데 북적이는 집안에서 진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점점 강도가 거세져서 오후가 되면서는 혼자 있고 싶어 안방에 틀어박혔다. 역시 출산교육에서 들은 대로 몸이 웅크러들고 어두운 데로 들어가고 싶고 눈이 자꾸 감겨 뜰 수가 없었다. 

 

때마침 반가운 선생님의 전화. 목소리만 듣고도 진행이 많이 됐다는 걸 아셨는지 바로 조산원에 오라고 하셔서 출발하려 하니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다. 

 

7시쯤 조산원에 도착해 겨우 한숨 내쉬었는데 진통은 더 심해졌다. 선생님이 보시더니 4cm 열렸고 새벽이면 나오겠다고 하셨다.

저녁을 먹고 오라고 하셨는데 난 토할 것 같고 움직일 수가 없어 남편만 가족들을 보낼 겸 나갔다.

 

그때부터 기나긴 혼자만의 산고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엎드린 자세로 허리를 흔들며 쉬운 출산을 위한 암시를 계속 외웠다.

신음이 강해지면 선생님이 오셔서 스르르 손가락으로 등을 어루만져 주셨는데 고통이 훨씬 경감되는 느낌이었다.

계속 자세를 봐주시기도 했다. 짐볼에 앉아서 움직이기, 자전거에 기대 엎드려있기..

나중에 보시고 12시 전에 나오겠다고, 힘 들어가면 힘주라고..

신음을 꾹 참고 아기의 움직임을 느끼며 호흡과 힘주기를 반복하니 아기가 많이 내려왔다고 10시 전에 나오겠다고 하셨다.

그때 슬몃 시계를 보니 9시 15분경. 저녁 먹으러 간 남편이 아직 돌아오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다 됐다 끝나간다 잘~한다

김옥진원장님의 시원한 화이팅을 따라 말하며 마지막 힘을 냈다. 선생님의 전화에 급히 돌아온 남편이 내 등 뒤에서 나를 안았다.

남편의 나왔다! 소리에 그제야 눈을 뜨고 이미 세상의 공기를 쐰 우리 아가를 보게 되었다.

9시 40분. 울지않는 아기.

정말 우는 소리 없이 자연스럽게.  뭐 하나 빠진 거 없이 완벽한 3.51kg의 서진이가 태어났다.        

좀 덜 스트레스 받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세상으로 미끄러져 나온 작지않은 아기.

 

남편은 등 뒤에서 사진 찍고. 곧 이어 나온 태반도 찍고. 선생님들 도움으로 탯줄을 직접 잘랐다.

곧 이어 내 가슴에 세모꼴 머리 모양 빨간 얼굴의 아기가 안겼다.

정말 예쁘다 고생했어 앞으로 잘해보자.

우리는 인사를 하고 젖을 물렸다. 아.. 엄청난 것이 지나간 후의 감동과 행복..  엄마로서의 뜨듯한 애정이 밀려왔다.  

 

그 이후론 비몽사몽.. 회음부가 거의 상하지 않아 꿰매지 않아도 되겠단 반가운 말을 들었고

남편은 옷을 벗고 아기와 캥거루케어를 했으며

몇 시간 후엔 앉아서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었고

새벽 내내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누워 열린 창 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새벽 도로의 차 소리를 들었다.

그때 계속 젖 물리는 자세를 봐주신 게 여태 완모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닌가 싶다.

 

아침이 되어 소변을 보고 아기 수첩과 출생증명서를 받아들고

우리는 셋이 되어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쓰다보니 길어졌는데 (쓰는동안 서진이가 두번이나 깼어요ㅠ) 그래도 빠진 것이 많은 부족한 글이 되어버렸다.

두서없는 글이 부끄럽지만.. 꼭 빠뜨리고 싶지 않은 것은 두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다.

서진이와의 첫 만남을 사랑, 감동, 행복, 안도, 감사..의 좋은 기억으로 만들 수 있게 도와주셨고

지금도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하면 안심이 되고 연락해야지 하는 마음만으로 위로가 되는 고마우신 분들이다.

 

고맙습니다.. ㅎㅎ

 

 

- 이렇게 크고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어 행복한

서진엄마.